문학/오늘 읽고 싶은 시와 글

고독의 탄생/장석주

석보 2009. 9. 14. 10:16

                                              고독의 탄생

                                                                           -장석주(시인)-

 

고독은 남자의 조건이다.

고독은 남자의 피,남자의 뼛속에 새겨진 신의DNA다.

 존재가 칼집이라면 고독은 칼집에 든 칼이다. "가슴속의 잗단 불평쯤이야 술로 씻어낼 수 있지만, 세상의 큰 불평은 칼이 아니고는 씻어낼 길이 없다."(장주,'유몽영幽夢影') 고독을 사모하는 자들은 무리에서 이탈해서 동굴에 숨어 은둔한다. 무리에 기대지 않고 고독이라는 정금(正金)의 시간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 바로 고독이다. 고독의 순간은 하나의 가능태를 품는다. 그 안에는 생명의 놀라운 도약, 창조의 돌연한 솟구침이 숨어있다.

 

여자에게는 고독을 향유할 능력이 없다. 여자들은 고독을 재앙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그 대신에 여자들은 사교생활과 수다와 쇼핑을 추구한다. 나는 여성 비하론자가 아니다. 나는 여자에게서 태어나고, 여자를 사모하고, 오로지 여성적인 것만이 인간을 구원한다는 괴테의 말을 지지한다. 그러나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고독 한복판을 가로질러 가는 여자를 본 적이 없다. 간혹 무리에서 떨어져 나온 여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런 여자들은 고독이 아니라 우울과 자기 연민 속에 자기를 가둔다. 고독은 누구나 앉을 수 있는 안락의자가 아니다. 고독은 모든 기득권과 편리를 버리고 오직 그것만을 선택할 실존의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우울함은 나태한 순간 저절로 찾아오는 것이다. 고독이란 불행의 회피가 아니라 불행의 적극적 선택이고,  그 불행 속에서도 꿋꿋 할 수 있는 용기며,범용한 영혼이 감히 꿈꿀 수 없는 비상한 철학, 그리고 형이상학적 도취다. 고독을 불행이라고 믿는 내 아들을 이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허리를 곧추 세울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개비 앞에서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잘 견딜 것"(졸시 명자나무)

 

본디 굴원(屈原,BC340-278))은 회왕의 신임이 두터운 신하였다. 그를 시기하는 자들의 참소를 당해 내침을 당했다. 굴원은 들과 강가를 짐승처럼 헤매 다녔다. 굴원이 머리를 풀어 헤치고 변방을 떠돌며 침음(沈吟)하니 그 모습은 남루하고 수척해 있었다. 어부가 그를 알아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닙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그러자 굴원이 대답하였다.

 

 "세상이 혼탁한데 나 홀로 맑다. 모든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 홀로 깨어있다. 그래서 변방으로 쫒겨난 것이다." 어부가 다시 물었다. "

 

사물에 구속받지 않고 세상의 흐름에 몸을 맡기며 사는 것이 성인의 취할 방도라 들었습니다. 세상이 혼탁하다면 어째서 그 혼탁에 의지하지 않으십니까? 가슴에 주옥을 품었으면서도 왜 스스로 피할 방법을 찾지 않았습니까? 굴원이 대답하였다.

 

 "얼굴을 씻었다면 모자의 먼지를 털고, 의복을 단정하게 차려입지 않겠는가? 결백한 몸을 때로써 더럽힐 수가 없다. 차라리 그럴 바엔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 밥이 될지언정, 어찌 세속에 몸을 더럽힐 수가 있겠는가?"

 

 내침을 당하지 않았다면, 양지의 안락에서만 살았다면, 굴원도, 그가 피로 쓴 '초사(楚辭)'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굴원은 내침을 당한 뒤 비로소 고독과 면벽(面壁)하고 '초사'를 쓸 수 있었던 것이다.

 

고독이 아닌 길을 선택하는 것은 차라리 쉬운 일이다. 정말 어려운 것은 고독한 길에 제 삶을 세우는 것이다. 왜냐하면 고독은 자존과 위엄과 관용에의 의지에서 나오는 까닭이다. 정말 고독한 자는 타인에 대해 너그럽고 자신에게는 엄격하다. 고독은 신이 지닌 내면 형질이다. 남자는 그 내면 형질을 타고났다. 물론 모든 남자들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남자들은 삶의 무게와 요망에 짓눌려 타고난 내면 형질이 뭉개진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남자들은 졸렬할 뿐이다. 졸렬한 자는 애써 고독을 외면하고 주색(酒色)과 도락 속에 제 영혼을 담근다. 모든 사람이 잠들어 있을 때 홀로 깨어 있을 수 있는 자, 무리가 희망을 향하여 나아갈 때  홀로 절망으로 뻗은 길을 표표히 가는 자, 폐허나 황무지에서 백년 뒤에 수확할 누군가를 위해 사과 나무를 묵묵히 심는 자, 원초적 혼돈 앞에 자신을 세울 수 있는 자, 오로지 그런 강한 남자만이 고독을 추종하고 고독을 품에 안는다.

 

 한 해가 저무는 섣달 어느 날 베토벤 교향곡 9번을  들을 때, 여름밤에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을 읽을 때, 복숭아를 먹으며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볼 때, 겨울 새벽에 권진규화집에서 그의 '자소상'(自塑像)을  볼 때, 한낮의 평온함 속에서 프르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을 때, 가슴이 두근거린다. 거기에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을 온전히 향유하려는 자의 고고함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내게 고독의 관능적 희열을 가르친다. 타아가 될 수 없다는 자각은 뼈저린 것이다. 고독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새벽빛과 같이 찾아온다. 위대한 자들은 그 새벽빛을 반긴다. 고독은 상처 잎은 영혼의 피난처가 아니다. 실존의 투기(投企)로 피가 튀고 찢긴 살이 나는 전쟁터다. 나약한 자들이 고독에서 한사코 도망가려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이렇게 기도했다.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예수는 고독을 회피하려고 했던 것일까? 아니다. 예수는 자기 앞에 놓인 잔이 감당하기 어려울 지언정 그것을 피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것이다. 고독은 무리에서 찢겨져 나온 매혹이다. 고독을 선택하는 자들은 "나는 고독하다. 이것으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내 사랑하는 아들아, 두려워하지 말고 가라. 고독의 광야로. 그 고독의 광야에서 매일 자신을 세 번 돌아보고 세 번 반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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